이 이야기를 첫 번째로 들려주게 된 것은 파인더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되려 키퍼인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한 명의 키퍼로서 공간에 존재했다면, 이 업무를 계기로 공간에서의 음료에 좀 더 집중 해보고 싶어졌고 이제는 커피와 음료를 담당하는 키퍼가 되었다.
“크림이 올라간 메뉴는 없어요?”
시작은 그랬다.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이 올라간 메뉴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 하긴 요즘은 어딜 가도 크림이 올라간 메뉴를 판매하니까,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없으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 서순라길이 북적이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도 점차 늘었다. 이윽고, 크림이 올라가는 메뉴가 없다는 대답에 돌아가는 파인더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답을 할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카페를 사랑하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을 즐기기 위해 방문했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쉬는 날 방문한 파인더,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머물기 위해 온 파인더, 서울로 여행을 온 파인더. 모두가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료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왔을 텐데, 아쉬움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쉬움은 다시 올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리가 없어서 방문하지 못했다거나 재료 소진으로 원하던 메뉴를 먹지 못했다면 다시 올 이유가 되지만, 돈을 지불했음에도 무조건 차선책을 골라야 할 때는 말이 달라진다. 그제서야 결심이 섰다. 대학생 때부터 오랜 시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 ‘새로운 베리에이션 메뉴를 선보일 때다!’라고.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키퍼 셋이 뭉쳐서 만든 곳이 <파이키>.
메뉴는 단촐했다. 카페 업무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곡물차를 이용한 숙성 우유로 시그니처 커피인 “파이키 라떼”를 만들었고, 엄선한 차 브랜드의 제품을 종류 별로 구비해 선택지를 늘렸다. 술도 고심해서 고른 흔적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만든 와인과 브랜디를 “탐험”해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뉴가 다양하다고 말하기엔 부족했다. 다양한 메뉴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도 바닐라 라떼를 판매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파인더의 입장에서는 익숙한 선택지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난다면? 머릿속에 물음표가 뜨는 것이 당연하다.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없지?” 그 다음 순서는 다시 결정하는 것. “그럼 뭘 마셔야 하지? 뭐가 맛있을까?” 누군가는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려 오히려 재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여러 차례 벽을 마주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다. 더군다나 주문하기는 공간 경험의 첫 스텝. 환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많이들 찾는 메뉴가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일반적인 아인슈페너를 판매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 따뜻하고 진한 블랙 커피 위에 이곳의 특색이 더해진 크림을 올려서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머무는 동안 또렷한 정신으로 “탐험”을 가능하게 하는 음료. 달달한 커피를 찾는 파인더에게 제안하기 좋은 그런 음료 말이다.
땅콩버터를 생크림에 넣어 보기도 하고, 시럽을 넣어서 휘핑을 해 커피에 올려 마셔 보았다. 따뜻하고 진한 아메리카노 위에 올리면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워서 온 몸이 노곤노곤해졌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선 모두에게 익숙한 아인슈페너의 느낌이 물씬 났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굳이 얘기해 보자면… <파이키>만의 개성이 부족했달까.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메뉴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뉴 개발이 처음이라 실력이 부족했던 것도 한 몫 했다. 가끔 시간이 남을 때 키퍼들과 나눠먹기 위한 음료를 만들긴 했지만, 진짜 레시피를 짜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 어떤 재료를 어떤 비율로 조합해서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또 내 입에만 맛있어서도 되지 않고 가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져야 하는데, 어디에 방점을 두고 개발을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그때, 먹맥이 제안을 했다. “시그니처 메뉴인 파이키 라떼랑 비슷한 맛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한 번 만들어 봐.”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어느 이정표를 따라가야 할 지도 모르던 여행자가 갈래길에 서있다, 우연히 길을 인도하는 요정의 안내를 듣게 된 기분이었다. (아 먹맥이 요정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답답했던 마음에 바람이 훅하고 들어와 속시원해지는 느낌!
그렇게 구수하면서 달콤한 크림 라떼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시그니처 메뉴 개발로 방향 설정을 하자, 어떤 크림을 만들어야 할 지 감이 잡혔다. 구수한 숙성 우유, 진하고 고소한 에스프레소와 어우러지는 달콤하면서 감칠맛이 도는 크림을 테스트 해보기 시작했다.
맨처음으로 한 일은 크림에 ‘고소함’을 더해줄 재료들을 사는 것.
잘 알다시피 ‘고소함’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깨에서 느낄 수 있는 고소함, 중강배전 원두에서 느껴지는 고소함, 견과류에서 느낄 수 있는 고소함・・・. 그중에서도 “파이키 라떼”에 쓰고 있는 숙성 우유와 잘 어울리는 맛이 무얼까 고심한 끝에, 미숫가루 같은 고소함을 선택했다. 아, 그렇다고 시중에 파는 미숫가루를 사서 넣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기에 미숫가루는 비교적 복합적인 맛을 가지고 있어서 우유가 묻힐 것 같아, 볶은 콩가루를 섞어 보기로 했다. 이외에도 동물성 생크림의 느끼함과 비린내를 잡아줄 수 있는 부재료들로 무엇을 쓸 지를 고민하며, 콩가루와 함께 다양한 조합으로 크림을 만들었다.
초반엔 이렇게 저렇게 섞어 보면서 상상하던 맛을 조합해내는 일이 재밌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일하는 중에도,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뒤에도 맛있는 크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레시피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비율마다 맛이 확연하게 달라졌고, 단맛이나 고소함의 정도를 설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에게 맛있고 달달한 크림이 누군가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대중적인 맛이면서도 개성이 살아있는 맛을 내고 싶었다.
두 달 동안 여러 차례 테스트를 했다. 반복되는 시간에 입도 머리도 마음도 지쳤다. 아니, 마비가 된 느낌이었다. 다른 키퍼들도 마찬가지였다. “맛 한 번 봐줄래요?”를 그들에게 참 많이도 말했다. (그들의 입도 지쳐있었지만 모두들 군말 없이 잘 마셔 주었다. 그래서 참 고맙다!) 발매 시점이 점점 지체되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확신도 사라져 갔다. ‘맛이 없진 않은데, 이렇게 하는게 맞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많이 품기도 했다.
어느 시점에 다다르자, 미세한 차이만 느껴지는 결과물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중에서 최선을 택해야 했다. 키퍼들도 더 이상의 테스트는 무의미하고 지금도 충분히 맛있다고 이야기 해준 덕에, 가장 파이키 라떼와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고소하면서 단짠의 맛이 있는 크림이 올라간 크림 라떼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2025년 3월 말에 “파이키 슈페너”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탐험 슈페너”. 선보인 시점부터 지금까지 줄곧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년 반이 훌쩍 지난 지금도, 깨끗하게 비워진 슈페너 컵을 정리할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종종 사진을 보여주며 “이 메뉴가 뭐예요?” 하며 주문을 하는 파인더도 생겼다. 계절마다 인기 있는 메뉴가 다르지만, 슈페너는 아메리카노처럼 인기 메뉴 반열에서 빠진 적이 없다. 파이키에서만 마실 수 있는 진짜 ‘시그니처 커피’가 된 것이다! 이제는 크림이 올라간 메뉴가 없느냐는 물음에 당당히 대답한다. “탐험 슈페너”가 있다고.
어쩌면 파인더에게 필요한 것은 크림이 올라간 메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즐거운 마음으로 온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탐험”의 포문을 내가 선택한 메뉴와 함께 여는 것. 기왕이면 쌉쌀한 일상을 달콤하게 바꿔줄 게임 체인저 같은 음료와 함께. 그걸 다들 바랬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