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문제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는 것이다.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나머지 시간에는 공부를 했다. 공부는 꽤 잘했지만 좋아해서 했다기보다 잘하니까 계속했던 것에 가까웠다.
초중학교 때는 외우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왔는데, 고등학교에서 이과 공부를 하면서부터는 그 방식이 잘 통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공대를 다녔다. 열심히 해도 재미가 없었다. 당시에는 내가 어떤 것을 깊게 파고드는 일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디자인이나 예술에 관한 것은 몇 시간이고 찾아보고 싶고,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다. 어쩌면 공부가 싫었던 게 아니라 이공계열 공부가 나와 잘 맞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직 몰랐던 것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한 뒤 1학년 때는 학교보다 놀러 다니는 일이 더 즐거웠다. 선배들이 1학년 때는 놀아야 한다기에 정말 열심히 놀았고, 결국 학사경고를 받고 군대에 갔다. 전역하고 나서는 다시 공부를 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재미가 없었다. 학교를 다니는 일이 점점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 되어갔다.
그러다 그냥 휴학을 했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토샵을 배우고 싶어서 학원에 등록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좋아해서 집에는 새로운 기계가 자주 들어왔고, 나도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만지는 데 익숙했다. 패션이나 예쁜 것들도 좋아했다. 컴퓨터로 예쁜 걸 만들 수 있다는 게 재밌어 보였다.
아마 디자인은 그 정도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포토샵을 배우던 어느 날 먹맥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봤냐고 물었다. 유럽의 호스텔을 돌아다니며 영상을 만들어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이야기였는데, 우리도 해보자는 것이었다.
나와 먹맥, 같은 단대의 친구 한 명과 형 한 명. 그렇게 넷이 각자 100만 원씩과 카메라 하나를 들고 유럽으로 갔다.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친구 집에 머물면서 호스텔 사이트에 올라온 이메일 주소를 찾아 하루에 거의 백 통씩 메일을 보냈다.
처음 답장이 온 곳은 바르셀로나의 한 호텔이었다. 우리는 영상을 만들어주고 숙식을 제공받았다. 다음 도시로 갈 곳을 찾기 위해 거기서도 계속 메일을 보냈다. 떠날 때 직원 한 분이 힘내라며 작은 돈을 건네줬다. 큰돈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은 오래 남았다. 낯선 곳에서 받은 별것 아닌 호의 하나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조금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유럽을 돌아다녔다. 여행 도중에는 나영석 PD가 기획한 여행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가 덜컥 당첨되기도 했다. 최대한 배낭여행객처럼 불쌍해 보이게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 도움이 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던 한 PD님은 우리가 영상을 만든다는 걸 알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일을 맡겨주셨다. 먹맥은 편집을 했고 나는 자막과 색보정, 음악 같은 후반 작업을 맡았다. 거의 20대를 그 PD님이 주신 일로 먹고살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이다.
유럽에서 돌아온 뒤에는 영상학과로 전과했다. 영화와 영상에 대해 더 깊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전의 공부와는 달랐다. 한 장면을 왜 그렇게 찍었는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같은 장면도 편집이나 음악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포토샵으로 예쁜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영상을 만들고 있었고, 영상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때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해보고, 필요한 걸 배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파이키도 비슷하게 시작됐다.
알밤과 처음 만난 건 먹맥이 참여한 애장품 전시였다. 알밤도 그 전시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인연이었는데, 이후 먹맥과 내가 구청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을 만들었을 때 알밤이 또 찾아왔다. 그렇게 셋이 책을 이야기하다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든 것은 파이키가 아니라 ‘커리북’이라는 온라인 책 추천 서비스였다. 셋 다 책을 좋아했고, 사람들이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게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이트를 만들 줄도 몰랐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날 접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밤이 서순라길이라는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가 아니었다. 먹맥이 직접 가보니 한 공간에 임대 문의가 붙어 있었다.
셋이 모여 이야기를 했다. 온라인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 힘든데,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면 적어도 누군가는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북카페를 해보기로 했다.
셋 다 자영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커피도 제대로 만들 줄 몰랐고,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를 오래 다녀본 사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무모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원래 그런 식으로 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 할 줄 아는 것만 골라서 하기보다, 해보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시작하고 부족한 건 하면서 배웠다.
파이키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디자인을 맡았다. 처음에는 슬로건 하나만 정해져 있었다.
찾는 사람이 임자.
그때 우리는 이 말을 꽤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뭔가를 찾는다. 찾으러 다닌다. 그러면 탐험 아닌가?
그래서 지도나 화살표 같은 탐험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그런 모습이 파이키다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꽤 일차원적인 연결이었다.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파이키에서 여러 작업을 하고 디자인에 대해 더 공부하면서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뭔가를 탐험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보다 왜 이것이 파이키에 있어야 하는지를 더 오래 생각한다.
내가 파이키에서 하는 일도 처음보다 훨씬 넓어졌다. 포스터와 안내 카드, 메뉴판을 만들고 상품을 디자인하고 공간의 사인을 고민한다. 컵과 트레이를 고르기도 하고 재고를 확인하고 발주도 한다. 회계나 일부 운영 업무를 제외하면 파이키의 꽤 많은 부분에 관여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디자인이 화면 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예쁜 메뉴판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메뉴를 더 쉽게 고르게 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고, 멋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
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처럼 한 장면만 봐도 그 앞뒤를 상상할 수 있는 것, 직접 설명하기보다 이미지나 은유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에 끌린다. 그래서 디자인에서도 모든 것을 바로 이해시키기보다 조금 숨겨두거나, 나중에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상품을 만들어 팔아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사람들이 실제로 손을 뻗는 것이 다를 때가 있다. 귀엽고 직관적이고 보는 순간 바로 예쁘다고 느껴지는 것이 훨씬 잘 팔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런 차이가 조금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잘 만들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디자인이 누군가에게 쓰이는 것이라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만큼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봐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만들면 된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사이에서 계속 판단해야 한다.
아마 요즘 내가 디자인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도 그 사이에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디자인을 예쁜 것을 만드는 일보다 세상에 있는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파이키를 만들기 전부터 비슷한 마음은 있었다. 디자인을 통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누군가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일 때문에 누군가가 전보다 조금 편해지거나 즐거워지는 것을 보면 나도 좋다.
유럽에서 떠나는 우리에게 직원 한 분이 건넨 작은 호의도 그래서 아직 기억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래 남기도 한다. 디자인도 꼭 거창하게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하루에서 작은 문제 하나를 덜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해온 작업을 조금씩 기록해보려고 한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만 보여주는 것보다 처음에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디서 막혔고, 왜 다른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남겨보고 싶다. 지금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몇 년 뒤에는 틀렸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왜 바뀌었는지까지 남아 있으면 된다.
이 기록을 통해 내가 어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지 조금 더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작업하면서 발견한 생각이나 실패가 누군가 자기 문제를 바라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좋겠다.
몇 년 뒤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잘 만든 결과물만 잔뜩 남아 있기보다, 내가 어떤 문제를 보고 어떻게 생각을 바꾸며 여기까지 왔는지가 보였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것이 하나쯤 남아 있다면 좋겠다.